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
세계적인 철학자 승계호의, 주제학으로 읽는 《파우스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벨룽의 반지〉
▼ 스피노자의 범신론에서 괴테, 니체, 바그너로 이어지는 자연주의 철학의 맥을 짚다
주제학主題學을 제창한 승계호에게 주제主題는 주인이 되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말이나 글의 제목을 제대로 알아내는 것은 그 말이나 글을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그리고 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주제에는 또 다른 제목인 부주제副主題가 딸려 있다. 〈창세기〉를 예로 들면, 그 주제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다.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들고 그들에게 계명을 주는 것, 그들이 계명을 거역하고 결국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모두 부주제다. 언뜻 보기에 이런 주제와 부주제를 밝혀내는 것이 평범한 듯하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지극히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그것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특정 해석이 정설이 되기도 한다.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에서 저자가 《파우스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벨룽의 반지〉를 해석하며 보여 주는 주제학적 방법은 아주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 대목을 작가의 실수로 보고 슬쩍 넘어가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끈질기게 탐구해, 작품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게 합일하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밝히는 데 탁월한 상상력과 정연한 논리를 함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세 작품을 아직 접하지 않은 독자라 해도 긴장할 필요는 없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기초한 자연주의가 괴테, 니체, 바그너의 작품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밝히는 이 책이 어렵기로 이름난 작품들에 좀 더 쉽게 다가가게 하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전설부터 플라톤ㆍ헤겔ㆍ칸트ㆍ노자 등 수많은 철학자의 사상과 단테ㆍ셰익스피어의 작품까지 아우르는 지적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위대한 작품의 품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어 끝없이 노력하는 파우스트를 그려 낸 괴테의 신비적 자연주의
범신론을 뜻하는 영어 팬시즘pantheism은 영국 철학자 톨런드John Toland가 그리스어에서 ‘전체’를 뜻하는 ‘판pan’과 ‘신’을 뜻하는 ‘테오스theos’를 합해 만든 말이다. 이런 어원을 통해 세계 전체를 신으로 보는 범신론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고대에도 있던 범신론을 철학적으로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스피노자는 유대-기독교적 신의 신성한 속성을 모두 어머니 자연에게 이전해 신을 해체했다.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지상의 정령이 대놓고 자신이 모든 자연 현상의 창조자라고 선포하게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의 주님을 자연화한 것이다. 그러나 괴테가 스피노자를 단순히 답습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영혼을 말 두 마리와 마부가 끄는 마차에 비유했다. 두 말 중 한 마리는 희고, 다른 한 마리는 검다. 훌륭한 백마는 영혼의 정신적인 요소를 추구하며 위로 날아오르려고 하고, 나쁜 흑마는 탐욕을 좇아 땅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이성에 해당하는 마부는 두 말의 다툼을 통제하며 마차의 방향을 잡는다. 지상에 발을 딛고 사는 속인으로서 초인의 열망을 품은 파우스트의 갈등에는 분명히 플라톤의 관점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근본적인 양극성을 나타내는 이 갈등의 해소는 파우스트뿐만 아니라 ‘괴테의 정신적 상속자’인 바그너와 니체에게도 아주 중대한 문제다.
한편 《파우스트》 끝 부분에서 파우스트의 영혼을 두고 메피스토와 다투던 천사들이 승리하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영웅이 결국 기독교적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주제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구원의 심리극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즉 죽음을 앞둔 파우스트의 내면에서, 공동체 정신을 표상하는 공동 자아인 천사들이 이기적 자기애를 표상하는 개인 자아인 메피스토를 물리침으로써 전보다 높은 차원의 윤리적 전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우스트》에서 기독교가 자연화되어 지상의 정령이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 이중 자아의 갈등을 극복하고 영원회귀의 본질을 밝혀낸 니체의 신비적 자연주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주제가 명확하지 못해서 대다수 독자들이 격언집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격언집’이 이 책의 주제가 되는데, 이 책에는 격언으로 볼 수 없는 진술이 많아 격언집이라는 주제는 일관성을 가질 수 없다. 특히 4부는 주제와 연결하기가 어려워서, 니체학계는 오랫동안 4부를 본문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즐거운 과학》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비극일 뿐만 아니라 패러디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 패러디 대상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에서 저자는 그 대상을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로 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네 부가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니벨룽의 반지> 4부 연작과 주제적으로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밝힌다. 더 나아가 저자는 니체가 바그너의 작품을 괴테의 《파우스트》의 패러디로 독해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파우스트》의 패러디이기도 한 셈이다. 이것이 저자의 삼중 패러디 이론이다. 그런데 오늘날 패러디라는 단어가 풍자와 조롱이라는 부가적인 함축을 수반하기 때문에, 패러디의 유래를 밝힌다. 패러디가 르네상스 시기 패러디 미사(변격 미사)에서 온 말이며 패러디 미사는 순전히 전래 미사곡의 연주를 개선하려는 열망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괴테에서 바그너를 통해 니체로 나아가는 패러디의 계보는 어머니 자연의 돌봄을 받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스피노자적인 개념을 시적으로 더 잘 표현해 내려는 일련의 분투다.
《파우스트》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연결된 지점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파우스트와 차라투스트라가 각각 맞선 ‘근심’과 ‘중력의 악령’, 그들의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개인 자아ㆍ공동 자아’와 ‘자율 의지ㆍ타율 의지’, 그들의 또 다른 자아인 ‘메피스토’와 ‘난쟁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작품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을 찾는 과정에 그 주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 니체가 끝까지 흠모한 자연주의자로서 바그너
사람들이 흔히 니체가 바그너와 단교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부당한 단순화다. 니체에게는 두 명의 바그너가 존재한다. 한 명은 비관주의자 바그너고, 다른 한 명은 자연주의자 바그너다. 니체가 분명히 비관주의자 바그너를 거부하지만, 자연주의자 바그너는 깊이 흠모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세계와 <니벨룽의 반지>의 세계의 공통 근거는 힘이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힘은 자연의 본질이다. 그러나 자연의 힘이 두 서사시에서 다르게 모습을 드러낸다. <니벨룽의 반지>는 두 종족 간에 벌어진 전쟁을 다룬 북유럽의 무용담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단일한 자아의 두 측면인 개인 자아와 우주 자아가 벌인 전쟁에 대한 반성이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인간 본성의 가장 고차원의 힘에서부터 가장 저급한 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극을 새로운 통일성 안에 함께 묶어 낸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결 상대이던 추악한 난쟁이와도 합일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니벨룽의 반지>는 개인들의 대립이 세계를 너무 심하게 찢어 놓는 바람에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기 힘들다. 다만 엄연한 진실은, 그 원시 세계가 무도덕성의 순수한 자연 세계이기 때문에 정의나 자애 같은 우리 시대의 가치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 오늘 우리에게 자연주의 철학의 의미
‘우리 시대의 일상적 인간들은 파우스트같이 거창한 영웅에게는 이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맞을 것이다. 240년 전인 1774년에 집필이 시작된 작품의 생명력이 여전하기를 바란다면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파우스트》는 지금도 끊임없이 새 번역이 나오고 무대에 올려진다. 지적인 면에서 신의 경지를 탐내고 자연과 합일을 추구한 파우스트가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만, 갈등하고 방황하며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모든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간척 사업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는 파우스트의 말년 모습은, 신의 영역으로 여기던 ‘생명 탄생’에까지 개입할 만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4대강 사업을 두고 몇 년째 논란을 겪는 우리에게 해법을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 세계를 나 자신과 동떨어진 정복의 대상이자 무한 대립의 터전으로 볼지, 아니면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조화의 길로 나아갈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1930년 평북 정주 출생
예일대, 포드햄대, 스크립스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현재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머리말
1 소원해진 초인 《파우스트》 서곡과 1부
2 환상 속의 초인 《파우스트》 2부 1~3막
3 반항하는 초인 《파우스트》 2부 4~5막
4 초인의 구원 《파우스트》 에필로그
5 니체의 초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과 1부
6 고통받는 영혼《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7 이중 자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8 디오니소스적 구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9 신비적 자연주의 괴테에서 니체로
10 바그너의 슈퍼 영웅 <니벨룽의 반지>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