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버리면 그대가 손해
장면과 장면의 이음새가 남다른 작가의 언어.
순수 문학과 대중 소설 사이의 절묘한 경계를 넘나든다.
이형순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자신만의 극장을 준비하지 않고 그의 글을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의 글은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독특한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속에 뛰어 다니는 캐릭터들 그리고 각 장면 장면이 이어지는 이음새가 영화와 닮아 있다.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장면과 장면이 편집된 시퀀스들을 보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저 장면과 장면의 조합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 한 것이 될 것이다. 그야 말로 ‘제대로 읽어내지 못 한 그대가 손해’가 된다는 말이다.
작가는 그의 소설 속 캐릭터들이 뛰노는 공간은 물론이고,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갈등 또한 영화적 느낌의 이음새로 묘사해 나간다. 사건 중심 혹은 캐릭터 중심 이라고 이야기 서술 방식에 있어 작가의 이야기를 푸는 언어들은 분석되고 정의 내려진다. 하지만, 이형순 작가의 글은 어떤 방식이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그의 언어를 기존의 문법으로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기존의 문단에서 신선함을 찾아 서점가를 이리저리 헤매던 독자라면 이형순 작가의 글에 주목해야 함을 강권한다.
- 얼마만인가?
알수 없는 감정이 수많은 논리와 이성을 지배해 버리는 이런 사랑 이야기란!!
살 이유가 없는 남자와 죽을 이유가 많은 여자의 사랑 이야기.
죽을 이유가 많은 여자 해인과 살 이유가 없는 남자 선재가 우연히 사도세자의 능(陵)에서 마주친다. 뒤주를 보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뒤주에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 혜인을 주시하던 선재. 그런 선재의 시선을 느낀 혜인이 뒤주를 가리키며 묻는다.
“들어가 보실래요?”
뒤주에 갇혀 죽어가던 사도세자의 비명소리가 다시 들리기라도 할 것 처럼, 죽음의 순간 속에 있던, 그 날의 사도세자의 삶에 대한 갈구를 기꺼이 듣고 보겠다는 것처럼 두 사람은 만나고 운명 같은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 후 인사동 거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우연히 찾아온 소나기에 몸이 젖듯이 우연히 찾아온 만남은 두 사람을 운명적인 인연 속에 젖어들게 된다. 자신을 천대해 달라고 애원하는 해인과 그런 그녀를 여신처럼 여기는 선재. 그들이 갖고 있는 사연은 무엇일까?
- 삶과 죽음에 관한, 한 판의 제의(祭儀)를 통한 질문. “당신은 살아 있습니까?”
뒤주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환기 시키는 메타포다. 나무 궤짝으로 쌀을 담아 보관하는 용도의 물건이자 역사적으로 비정한 아버지로 유명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것으로 이용한 물건도 뒤주이다. 작가는 이 뒤주가 갖고 있는 양가적 상징에 주목한다. 삶과 죽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같이 있는 것이며 아예 그 경계조차 지워 오히려 독자에게, 읽는 그 순간의 삶을 살고 있는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순간에도 살아 있느냐고. 이형순 작가의 〈날 버리면 손해〉는 이러한 물음을 던지기 위하여 작가 특유의 영상적 묘사로 캐릭터들을 그려내며 그들의 삶을 조망한다. 그것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한판의 제의를 펼치는 것처럼.
청춘의 사랑과 방황을 이야기의 저면에 흐르는 존재의 물음을 따라가 보면, 읽는 저마다 모두의 젊은 날의 초상을 생각 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