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16세기, 특히 그 후반기의 봉건조선은 안으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제모순(諸矛盾)에 얽히어, 전체가 파탄(破綻)과 붕괴(崩壞)의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또 밖으로 남왜(南倭)와 북호(北胡)의 도량(跳梁)이 미묘하여, 어느 때 어떠한 큰 폭풍이 불어올지 모를 음울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이때 천부(天賦)의 재질과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포부(抱負)를 가지고 정계(政界), 학계(學界) 및 사회를 통하여 다각적으로 자기의 탁견(卓見)을 토로(吐露)하여 현상을 타파하고 유신(維新)의 치(治) 내지 유자일류(儒者一流)의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건설하려고 시종 노력한 이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이었다. 참으로 율곡은 당시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철인(哲人)이요, 경세가(經世家)요, 교육가요, 문인이요, 또 능변가(能辯家)이기도 하였다. 유학(儒學)에 있어서는 유자 본래의 사명인 수기(修己)ㆍ치인(治人)의 도(道)를 강조하여 그중의 하나라도 결(缺)하여서는 진유(眞儒)가 될 수 없다는 태도였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면에 있어서도 명쾌한 논리를 전개하여 확실히 선유(先儒)의 설에서 진일보한 느낌을 주었다. 정치와 실제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항상 합리적인 개혁주의를 주장하고, 특히 당시 분열된 당파의 합류 설득에 분주하여 이 국가 사회를 부패ㆍ분열ㆍ붕괴에서 구출(救出)하려고 무한 애를 쓴 유일한 존재이었다.
저자소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어머니는 신사임당.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54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 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3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육조 낭관직, 대간직, 옥당직, 승지직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았다. 그래서 폭넓은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1576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갈등 중재가 실패하고, 선조에게 건의한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교육과 교화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현안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 실시와 동인과 서인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이 무렵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격화되어 이이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동인 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어 강력한 탄핵이 뒤따랐고,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저서로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한《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기자실기(箕子實記)》, 《경연일기(經筵日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