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성호사설은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한다. 단, 성호사설은 260여 년 전에 쓰였고, 이익 혼자 썼다는 사실이 오늘날 백과사전과는 다르다.
성호사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년 전, 정확히 1740년에 쓰였다. 이 시기는 조선 후기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은 후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농토는 황폐화되어 농업 생산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많은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다. 국가 재정도 고갈되었고, 고갈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국가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온갖 만행을 자행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혔다. 또 지배층 내부에서도 정해진 관직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소수의 특권층만 살아남아 국가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넓은 토지를 사유하였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경작할 땅이 없는 무전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 사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성리학도 이 시기에 오면서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흘러 비생산적이고 비현실적이 되었고, 유일사상화되어 지배층의 자기 방어 도구로 전락하였다. 다시 말하면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한마디로 조선 후기는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었다.
저자소개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성호(星湖).
아버지가 1680년 경신환국 때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을 당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광주 첨성리(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서 살았다. 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워 1705년 25세 때 증광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이잠이 당쟁으로 인해 죽게 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727년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1763년 83세 때 조정에서 첨지중추부사의 자급(資級)을 내렸으나 그해 세상을 떠났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익의 학문은 아버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수많은 서적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처음에는 성리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여 정책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노비의 신분 세습을 폐지하여 농민의 신분을 갖게 하자는 양천합일(良賤合一),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하였다. 또한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공거제(貢擧制)를 함께 실시할 것, 무기 개발과 군마 양성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혁신적인 주장하였다.
저서로는《성호사설》,《곽우록》,《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서삼경》,《근사록(近史錄)》등이 있고, 편저에《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자복편(自卜編)》,《관물편(觀物編)》,《백언해(百諺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