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 실천시선 220
사랑의 통증과 슬픔의 깊이를 노래하는 ‘심장의 시인’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안상학 시인의 새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등을 통해 질박하면서도 결 고운 서정을 독자들에게 보여준 바 있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짙은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며 인간의 삶에 만연한 슬픔의 몽우리들을 보듬는다. 그는 마음의 허리를 굽혀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오래도록 쪼그려 앉아 그 작은 것들의 소리에 정성스레 귀를 기울인다. 사랑하는 것들과 가까이 살 수 없는 생이여 “사람은 고독할 때만이 자신과 이웃에 대해 진실할 수 있다. 안상학의 시에는 유난히 외로움이 가슴 아프도록 깔려 있다. 외로움을 아는 인간은 그 외로움에 대한 소중함도 안다. 결코 외로움을 떨쳐버리려는 무모한 짓은 말아야 한다. 고독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아동문학가 고(故) 권정생 선생이 안상학 시인의 한 시집에 부친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 시집에는 안상학 시인의 가슴 아픈 외로움이 도처에 깔려 있다. 심장이 아프면 발바닥 혈을 누른다 꾹꾹 누르면 심장인 듯 통증이 인다 지압을 하면서 나는 중국의 어느 한쪽 팔이 없는 발레리나와 한쪽 다리가 없는 무용수가 짝이 되어 한 몸인 듯 추던 춤을 떠올린다 심장이 아파도 같이 아플 발이 없는 사내 발이 있어도 같이 주무를 손이 없는 계집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 통점을 어루만지는 둘이서만 출 수 있는 그 춤을 떠올린다 _ 시 「지압」 부분 심장을 주무를 수 없어서 심장혈을 꾹꾹 누르던 시인은 발바닥 어딘가에서 같이 아파할지도 모를 마음의 혈을 짐작해보며 몸보다 마음이 더 아려온다. 시인은 그것을 “기가 막힌 독거”라고 말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된 것들이 있다. 우리는 만질 수 없는 그것들을 그리며 더욱 고독해지는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사랑하는 것들과 가까이 살 수 없는 이번 생”(「소풍」)에서 시인이 목격한 삶이란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이다. 헤어짐의 대상은 고향이거나 부모님, 또는 그늘에서 자라는 고추거나 두 다리가 퉁퉁 부어 죽은 귀뚜라미, 키 작은 꽃과 같은 것들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것들과 운명처럼 만나고, 또 운명처럼 헤어진다. 한자 ‘運(운)’에는 옮기다, 보내다라는 뜻과 함께 돌리다, 회전하다라는 뜻이 있다. 인간의 ‘命(명, 목숨, 언약)’은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중략)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_ 시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부분 ‘기쁜 사랑’과 ‘슬픈 사랑’의 합주 어린 시절 시인의 아버지는 감기에 걸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낑낑 앓”는 그에게 “신시장 보신탕 골목에 다녀오라고/지전 몇 장 처방전인 양 쥐여주었다”. 하지만 시인의 딸아이는 어린 날 그처럼 비위가 약해서 “감기약으로도 도통 먹으려 들지 않”는다. 그는 “불교도 미신도 아닌 비위 약한 아들놈 달래는” 그 말을 떠올리며 “아배에게서 배운 부정을 쓸 기회가 없”어 하릴없이 “감기 걸려 혼자 찾은 상주식당에서 소주 한잔 곁들”일 뿐이다(「감기약」). 처마 밑에 나앉아 손 마중 문득 멀리 조탑동 빈집 비 맞고 있겠다는 생각 누가 있어 이 한밤 손 마중할까 조탑동에 내리는 비 아무래도 쓸쓸하겠다 _ 시 「비 오는 새벽」 부분 사랑하는 것들은 우리 곁을 쉽게 떠난다. 시인이 ‘아버지’라 부르던 권정생 선생은 몇 해 전 세상과 이별했다. “평소 자신의 몸 상태를/멀쩡한 사람이 쌀 석 섬 지고 있는 것 같다”던(「쌀 석 섬」), “콩팥이 안 좋아서” 전화번호마저 “팔어팔으 콩팥콩팥”이던(「858-0808」) 권정생 선생,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살다가, “이 악물고 술 마시고/이 악물고 노래하고/이 악물고 시를” 쓰다가 몇 해 전 노동절에 역시 “이 악물고” 죽은 임병호 시인(「임병호」), “뿌리 뽑아 씻어 들고 서울 떠나 해남으로 간/물푸레나무” 시인(「어느 물푸레나무 시인의 죽음」), “5?18 기념일에 돌아가신 아버지”, “박영근 시인”, “박경리 선생”(「오월」), 그리고 “잊지 못할 단원고 250 꽃들”(「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까지 살아생전 그와 웃음을 나눈 사이든, 그렇지 않든 그의 곁을 떠난 이들을 시인은 가슴 아프게 호명한다. 생은 단 한 번의 시작과 끝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시작과 끝의 연속이다. 그 안에 “기쁜 사랑”과 “슬픈 사랑”이 있을 것이고(「어매」), “치열한 사랑일수록/닮아가는 것이 아니라/서로가 서로다워지는 것”(「바지랑대」)이라는 시인의 말을 믿으면 오늘의 한 이별에 조금 더 담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늘 공부만 하는 ‘상학이’가 아니라, 늘 다치고 상처받는 ‘상하기’”(김해자 시인의 발문 중에서), 난로를 가까이해서 천천히 다리를 익혀 “저온 화상”을 입기도 하고, “최고 속도의 잠”으로 가로수에 차를 부딪혀 죽음 근처까지 다녀오기도 한 시인은 화상을 입거나 교통사고가 나는 것보다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듯 악보를 접어 칠성판/처럼 깔고 누워 있”는 귀뚜라미가(「가을밤」), “기를 쓰고 피운 터무니없이 작은 꽃 몇 송이/죽기 살기로 키워낸 풋고추 두어 개”가(「그늘 고추」) 더 아팠을 것이다. 시인의 눈에는 이 키 작은 꽃이, 죽어버린 귀뚜라미들이 그늘에서 자라는 고추가 “팔레스타인 1,300인”이고, “아버지”, “어매”고, “권정생” 선생이고, “250 꽃”들이었을 것이다. 그만하고 가자고 그만 가자고 내 마음 달래고 이끌며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문득 그 꽃을 생각하니 아직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보이네 _ 시 「늦가을」 전문 그가 “아침처럼”, 내가 “봄처럼” 돌아왔을 때 누가 그곳에 있어줄 것인가.
196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 등을 펴냈다.
제1부 벼랑의 나무 소풍 지압 저온 화상 맹도견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내 한 손이 내 한 손을 얼굴 늦가을 가을밤 뿌리 바지랑대 귀를 옹호함 착종 병산서원 복례문 배롱나무 제2부 쌀 석 섬 앙숙 발밑이라는 곳 크리스마스로즈 조물주 팔레스타인 1,300인 평화라는 이름의 칼 어매 비 오는 새벽 858-0808 임병호 오월 어느 물푸레나무 시인의 죽음 엄마 아빠 노란 리본을 달고 계세요 귀 제3부 거문도 동백나무 감기약 난 겨울 무지개 아버지의 꼬리 겨울 물은 그렇게 흘러가는 중 잠자리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 고들빼기꽃 호랑지빠귀 우는 밤 최고 속도의 잠 그늘 고추 꽃이 그려준 자화상 난독증 冬眠 제4부 병산 노을 雨水 운람사(雲嵐寺) 봉정사 영산암 단천 마을 안동 숙맥 김만동 안동 숙맥 흰둥이 목련 장수 자력갱생 발뺌 지천명 南原行 구색 이상한 女子 발문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