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 실천시선 219
시대의 아픔으로 지은 평화의 노래 1990년대 시집 『겨울 경춘선』과 『저물 무렵』을 발표하며 80~90년대 한국의 암울한 시대상을 노래하며 현대사의 좌절을 딛고 새로운 깨달음을 모색한 신동호 시인이 20년 가까운 오랜 침묵 끝에 새 시집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분단과 분열, 억압을 극복하고 화해와 소통, 이해로 가는 길을 찾고자 모색한다. 시인은 그 길에서 성공보다는 실패를, 희망보다는 좌절을 후대에게 넘겨주고자 한다. 후대는 그것을 탐침봉 삼아 현실이 좌절한 원인을 찾아 극복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지나 봄…… 그러나 다시 겨울 “갈 곳이 더는 없었네/더 가봐야 철책선,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시작하는 시 「겨울 경춘선」을 읽어본 이라면, 이 표제시를 품고 있는 그의 첫 시집 『겨울 경춘선』을 읽어본 이라면, 80년대 말 90년대 초 뜨거운 가슴으로 이 땅을 살아온 이라면, 신동호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힘차고 푸르렀던 젊은 날의 심박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막차. 겨울은 뼛속까지 밀고 들어왔다. 사랑이 고통이라면 다른 고통쯤은 다 잊고도 남았다. 시간이 가까워오면 조금씩 대화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말줄임표도 사라져갔다. 우리들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을까, 새벽을 기다리며 가난한 대합실의 작은 온기를 나누었을까. 사랑은? 종착역. 끝이 없는 여행은 없다. 없기에 슬프고, 없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혁명은 억지로 봄을 부르지만 겨울아, 왜 사랑은 눈꽃처럼 네 안에서만 피어나는 것이냐.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동자는 아직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길 끝에 종종 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_ 시 「겨울 경춘선 2」 부분 20년 만에 경춘선을 달리는 겨울 기차가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도 뼛속까지 밀고 들어온다. 오래전 그에게는 “가난한 대합실의 작은 온기”를 나누듯 따뜻한 사랑을 나누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취방 문을 부수고 들어가 난장을 만들어놔도 ‘내 새끼’ 하던 “남철 형”, 민족 해방 얘기는 하지 않고 만날 고향 얘기만 하던 “종혜 누님”, 칸트를 읽고도 운동권이 될 “광운”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이 모여 살던 골목, 그 골목의 제일분식에서는 “계급 운동이 막걸리를 마시고”, 이모집에서는 “민족 운동이 젓가락을 두드렸다”(「譜學」). 그 시절 그들의 주머니는 텅 비었을지언정 가슴만은 늘 부푼 꿈으로 두둑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추운 겨울도 머지않아 끝나리라 믿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 봄이 올 줄 알았더니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내 친구 내 부모를 지킨다는/그래서 내 동포 내 조국을/영영 동강낸 채 내버리고 말겠다는”(「겨울 경춘선」, 『겨울 경춘선』) 철책선은 아직도 건재하다. 이 겨울의 막차는 여전히 갈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광운”이는 약을 먹고 바다거북이 되었고, 인문대 계단 끝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조그만 여자 “종혜 누님”은 지금 그곳에 없다. 제일분식과 이모집의 “악다구니”들은 바다로 가버렸고, 그렇게 그들의 꿈도 푸르렀던 그 시절과 함께 “유폐”되었다. 그곳은 “안기부 지하실”이거나 “서울구치소”, “박제된 동물”들이 전시된 “자연사박물관” 한쪽 귀퉁이다(「운동권 考古學」). 친구를 잃어버리고, 꿈도 잃어버린 한 남자의 뒷모습은 “늙은 코끼리”처럼 쓸쓸하다. “열망을 이루지” 못한 그는 “열에 들뜬 후회”를 짊어지고 “억새 빛나는 황혼 길”을 걷고 있다(「가을 나그네」).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사막은 뜨거웠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을 따라 민주주의는 자주 자리를 옮겨 다녔다. 모래언덕을 오르며 뒷걸음칠 때 마른번개가 몰아쳐왔다. 낙타는 천둥 속으로 묵묵히 걸어갔고 나는 목도했다. 피뢰침을 머리에 꽂고 장준하가 쓰러졌다. 김근태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오래도록 엎드려 신을 향해 기도했으나 그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아라비아 공주는 군사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_ 시 「영등포에서 보낸 한 철」 부분 광운이와 종혜 누님, 남철 형이 사라진 땅에서 “사거리에 안철수의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 ‘새정치’가” 그를 내려다볼 때, 시인은 마치 자신이 “수락산 능선의 떡갈나무처럼 통째로” 쓰러진 것만 같다(「늙은 코끼리」). 혁명은 전염병처럼 왔다가 “카-알(Karl)”만 남기고 사라졌고,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도 모른다(「阿Q」). 남은 것은 후회뿐, “사랑도 혁명도 차단기를 내린 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눈은 쌓이지 못하고 그렇게 흩어져갔다”(「겨울 경춘선 2」). “공주가 城 밖에서 늙은 왕의 옥새를 들고 식민지 백성을 용서하고” 있었다(「阿Q」). 북녘땅에서 보내온 봄 편지 시인에게 북녘땅보다 추운 곳은 오히려 남녘이었다. “시려웁게 겨울을 보내는 더는 갈 곳 없는/겨울 경춘선”에서 “보고 싶은 내 친구 내 형제들이/빙하기를 살고 있다는 태백산맥의 골짜기”를 꿈꾸던 그는, 학생 운동을 주도하다가 독재 정권에 의해 두 차례나 감옥에 갔다 왔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통일 운동을 해오며 남과 북이 가슴과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가 꿈꾸는 것은 “정치 없는 만남”이었다. 눈발이 날리는 개성공단에서 러시아 샤프카를 쓴 조선노동당원을 만났다 정권이 바뀌던 해 세밑이었다 반갑게 손을 잡고 긴급히 토론할 일을 묻자 그냥 보고 싶어서였단다 봉동관에서 송악소주를 마시고 낮부터 넥타이를 풀었다 정치 없는 만남이 있을 수도 있다고 _ 시 「색동저고리」 부분 “정권이 바뀌던 해 세밑”에 “봉동관에서 송악소주를 마시고 낮부터 넥타이”를 푼 그들은 “털게의 속을 하릴없이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간혹 남북 관계를 걱정”하다가 “항일 무장투쟁 시기의 눈보라나 지리산 얘기”도 시시해지자 “노동당식의 음담패설”에 귀를 기울였다. 맑은 소주병 안으로 눈물이 고이면 “막내딸 걱정이나 첫사랑의 기억이 애절하게” 떠올랐다. 마침내 “혁명가요는 잦아지고” 남북의 남자들이 평양관광대학 출신 여성이 부르는 노래 를 ‘탁아소’나 ‘유치원’ 아이들인 양 따라 불렀다. 누군가의 아버지요, 남편, 형제인 그들의 ‘정권’과 ‘정치’가 ‘눈물’과 ‘첫사랑’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남과 북이라는 거대한 분단 서사 아래 잠들어 있던 서정을 깨우는 순간이었다. 시인은 평양관에서 무지개식당을 거쳐 평심각에 이르러 “사상은 서사보다 못하고 서사는 친구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은어 알이 입속에서 터져 미각을 자극하는 순간 모든 선언과 확언이 의심스러워졌다”(「심양, 은어조림」)고 고백한다. 시인은 “이래도 되는가 이래도”라고 하지만, 그것은 곧 ‘이래야 한다, 이래야 한다’라는 내면의 웅변이었다. 이제야 철조망이 보인다 나는, 내가 자유인인 줄 알았다 망명의 꿈도 꾸지 못하는 포로였음을 사랑을 의심하고서야 종북과 종북 아닌 것의 사이에서 담배도 못 피우고 있었음을 알고 나서야 탈출할 곳도 없이 경계를 넓힌 한국이라는 이 거대한 포로수용소에 갇혀서 이토록 오래 자유인인 줄 알았다 _ 시 「포로수용소」 부분 그는 밤새 술에 취해 거리를 활보하며 함부로 사랑을 말하였으므로, 때론 사치를 부리기도 했으므로 스스로가 “자유인”인 줄로만 알았다. 광장에 서서 자유의지를 표출하며 종북과 종북 아닌 것 그 경계에 자유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반공과 반공 아닌 것을 나누던/거제도 포로수용소가/단지 그 경계를 넓혔을 뿐이었다는 걸/시인 김수영이 죽고 사십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포로수용소」). 짧기만 한 만남을 끝내고 시인은 “조선노동당원의 어깨를 부여잡고 언제 또 만나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 대신 바람이” 불었다. 남북저작권센터의 통일 오작교 놓기 시인은 그의 시집을 오래 기다린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꼭 시를 써야만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시집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산문집을 여럿 발표하며 여전히 현실 한가운데서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프고 소외된 곳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단 한순간도 시인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스무 살에 90년대를 버텨온 이들의 가슴에는 아직 그의 시어들이 비수처럼 꽂혀 있다. 한 시대의 격랑을 그처럼 온몸으로 부딪친 이도 드물 것이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문화국장으로 학생 운동을 주도해온 그는 몇 년 전 남북저작권센터를 꾸리고 남과 북이 불행한 과거를 용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1995년쯤 한 대형 서점에 간 그는 『조선수군사』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를 갖고 펼쳐보았는데, 껍데기만 남쪽 식으로 새롭게 덧씌우고 속은 북쪽 책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 후 합법적인 저작권 교류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오며 2000년 6.15 선언을 기회 삼아 통일부에 ‘북한주민접촉승인서’를 접수했다. 승인이 나오자 그동안 조사한 저작권 침해 사레와 저작권 교류에 대한 기획서를 들고 무작정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다. 첫 번째 무모한 시도 끝에 다음 해 두 번에 걸쳐 북쪽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금강산에서 열린 6.15 1주년 기념하는 행사였는데 이때 시인 박세옥, 소설가 김보행 등 작가동맹의 노작가들과 함께 장혜명 통일문학 편집국장과 젊은 시인 신흥국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해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축전에서는 홍석중 선생을 비롯해 『청춘송가』의 남대현 선생도 만날 수 있었다. 2003년에는 문화 협력 사업으로 남북저작권센터 구성과 남북 합작 영화, 전자도서관 구축, 인쇄소 설립 등을 추진했다. 이후 남쪽 최초로 남북 간 직접적인 저작권 양도계약서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임꺽정』, 『고려사』, 『황진이』 등 서적의 보상 문제를 처리하기로 하고, 『휘파람』 등 노래와 200여 종의 서적에 대한 이용과 재출판 사업이 제기되었다. 그때까지 남쪽에서 출간된 북녘의 책들은 거의 모두가 불법(?) 출판물이었다. 해방 이후 한설야나 이기영과 같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출판된 사례가 있으나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금서로 묶여 출판이 금지되었고, 극히 제한된 곳에서 복사물이 읽히기도 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불법은 상업적으로 ‘혹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변모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수군사』처럼 때로는 표지갈이만으로, 심하게는 『북한의 민속놀이』처럼 저자가 바뀌어서 출판되었다. 『리조왕조실록』과 같은 규모가 큰 출판물은 형식상으로 판권 계약이 이뤄졌지만 실상 저작권자인 북쪽의 연구자들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중국의 브로커와 제3자 계약이나 불평등 계약으로 저작권료가 북쪽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분단 상황은 많은 불합리를 낳았다. 분단으로 허용되는 것들이 무질서를 방조했고 그 무질서가 불신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제는 남과 북이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출판과 관련된 문화 교류는 북녘에서 민족화해협의회가 담당한다. 대남사업단위인 민족화해협의회를 통해 저작권사무국이나 사회과학원, 인민대학습당, 윤이상음악연구소 같은 단위들과 접촉할 수 있다. 현재 남쪽에서는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과 남북저작권센터를 통해 민족화해협의회의와 만날 수 있다. 그해 겨울 운행을 멈춘 듯하던 겨울 경춘선이 실은 꽝꽝 얼어붙은 동토를 뚫고 이 겨울에도 쉼 없이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